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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유신론, 민족 지성 한용운이 제시한 한국 불교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36
저자

한용운 지음

옮김

정은주 풀어씀

발행일

2017-11-10

면수

153*212

ISBN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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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1161727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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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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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시인,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민족 지성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집필한 불교 개혁론이다. ‘청소년 철학창고’ 서른여섯 번째 책으로, 생소한 불교 용어나 고전 문구가 나올 때마다 원서에 없는 해석과 배경지식을 병기하고 한용운이 저술한 다른 논설 자료나 시 등도 다각도로 참고했다. 원서는 서론부터 결론까지 17장으로 나누어 서술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주제별로 묶어 6장으로 재구성해 청소년들이 더 쉽게 이해하도록 했다.
‘유신(維新)’은 낡은 제도나 관습을 청산하고 항상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는 의미다. 한용운은 불과 서른두 살이던 1910년에 당시 불교의 타락상과 나태함을 하나하나 파헤쳐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완성했다. 당시 불교계는 조선 시대부터 시작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쌓여 온 무기력과 무질서, 각종 인습과 폐단으로 얼룩져 있었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정치·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와 혁신이 활발한데 오직 조선 불교만이 미신, 기복, 은둔 등 인습에 젖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불교 교리와 철학에서 시작해 승가 교육과 수행, 참선, 불교의식 간소화, 의례나 포교 방식 혁신, 불교를 통괄하는 조직 기구 구성, 심지어 승려의 혼인 문제 등 일제 식민 치하 당시 불교계의 당면 문제에 대해 과감하고 파격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한용운은 불교를 동양과 서양의 주요 종교 철학 사상과 비교해 논했고, 불교가 깊은 산중이 아닌 대중 안에서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불교유신론》에는 불교개혁 의지뿐 아니라 만해 한용운이 지닌 역사의식과 세계관, 시대상이 담겨 있다. 종교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불교 전반에 걸친 예리한 관찰과 비판, 시대에 뒤떨어진 우리 불교를 개혁할 새로운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 우리 사상계에 큰 영향을 남긴 명저로 손꼽힌다. 오늘날 종교계와 사회상까지도 돌아보도록 이끄는 혜안과 과감한 대안을 통해, 진정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불교개혁과 새 시대를 향한 한용운의 열망과 사상이 담긴 명저 《조선불교유신론》


《조선불교유신론》은 구한말에서 식민지 시대 초기에 우리 불교가 처했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개혁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그 핵심은 전통 불교의 미신적·기복적·은둔적 모습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불교 본래의 철학적·종교적·대중적 정신을 회복해 근대화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불교로 거듭나자는 것, 즉 유신(維新)을 하자는 것이었다.
1913년 출간된 《조선불교유신론》은 총 17장을 내용 구분 없이 쭉 나열하는 서술 방식이었다. 따라서 전체 개요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 청소년 철학창고 36번으로 출간된 이 책 《조선불교유신론, 민족 지성 한용운이 제시한 한국 불교의 길》에서는 유신의 내용을 주제별로 서론, 불교의 근본과 혁신, 승가의 혁신, 수행과 포교의 혁신, 사찰과 의례의 혁신, 결론 등 총 6장으로 재구성했다.
서론에서는 먼저 당시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를 향한 변화와 유신의 기운이 차오르고 있는데 오직 조선 불교만이 ‘유신’을 외면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 책임을 종단이나 사찰보다는 ‘나’라는 개인에 있음을 강조하며 여러 승려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어서 한용운은 불교의 근본과 그 안에 담긴 사상을 들여다본다. 불교는 단순한 미신이나 철학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위대한 사상으로, 동서양과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이끌어 갈 철학이자 종교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 이는 서양에서 정치 민주화와 과학 발전을 이끈 자유주의 사상과도 통한다고 보았다. 시대에 뒤처진 구습이나 인습을 타파하려면 먼저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과감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당시 품위가 떨어지고 타락한 승려들의 자질을 개선하려면 근대적인 승려 교육이 절실하다고 한용운은 주장했다. 기초 학문인 보통학, 자연계와 인문계를 포괄한 사범학, 한문과 지식의 발전과 교류를 위한 유학 등이 그가 제시한 개선책이다. 또한 승려들이 신도의 보시에만 의존해 구차하게 지내지 말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찰도 수익 사업을 통해 자활할 때 승려 인권이 회복된다고 보았다. 지금까지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온 승려 혼인 주장도 이러한 맥락을 잇는다. 한용운은 승려 혼인이 불교 계율에서 금지한 사항이긴 하지만, 계율이란 득도를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승려가 독신 생활을 계속하면 사회 윤리에 해롭고, 인구가 줄어 국가적으로 손실이며, 포교에도 해롭고, 풍속에 해롭다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승려 개인의 선택에 맡기자는 주장이다.
한용운은 제도 개선의 필요성 또한 놓치지 않는다. 승려들은 대부분 외딴 산사에서 고립되어 살기 때문에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 되기 쉬우며, 따라서 승려들도 서로 단결되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조직과 체계를 갖춘 중앙 교단을 만들고 승려들 개인은 봉사 정신을 갖고 뭉쳐야만 한다. 따라서 주지가 개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도록 선거를 통해 선발하고 전체 사찰과 재산을 통괄하는 기구를 수립하자고 그는 역설했다. 시험을 통해 선발된 자들만 선방에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며, 모든 불교 의식을 간소화하고 제사 등은 폐지하고 미신 요소가 많은 각종 탱화나 상들도 철거하자고 주장했다. 거짓된 염불과 유행처럼 번지던 염불당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당시 열성으로 포교하며 각종 사회사업으로 교세를 확대하던 서양 기독교의 포교 활동을 본받아, 조선 불교도 산사에서 나와 도심지에서 대중 포교를 하며 중생과 교류를 넓혀야 구세주의가 완수된다고 보았다.
《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이 일본의 조동종계 불교 대학에 잠시 유학했다가 돌아와 1909년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통쾌하고 속 시원한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열렬한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그 주장의 비현실성 탓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불교의 타락상과 안일함을 낱낱이 파헤친 비판 정신이다. 또 승가 교육이나 수행, 의례나 포교 방식의 혁신 등 불교계 당면 문제에 대해 파격적이고 과감한 대안을 모색했다는 점도 주목할 지점이다.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 온 생애를 바쳐 시대를 이끌어 간 민족 지성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한 한용운은 서정 시인인 동시에 저항 시인, 민족 시인으로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문학이라는 범주로만 한정할 수 없는 폭넓은 삶을 산 인물이다. 시와 소설, 평론을 남긴 문인이기도 했지만 설악산, 금강산 등 고요한 산중에 은거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한 선불교의 승려였고, 3·1 운동에서는 불교계 대표로서 일제에 날카롭게 저항한 독립운동가였다. 시대를 이끈 이런 선각자다운 모습은 1932년 조선 불교의 대표 인물 선정에서 1위에 오를 만큼 당대에도 높이 인정되었다.
한용운은 1897년, 조선 초기 세도가 한명회의 후손인 양반 가문이었으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용운의 학력은 어릴 적 서당에서 배운 한학과 출가 뒤 설악산에서 배운 불교 경전 수업 그리고 일본 여행 도중 잠시 조동종 대학에서 공부한 경험이 전부였다. 하지만 독서의 폭이 넓었고 지적인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에 독학으로 유교나 불교 등 지식을 터득할 수 있었고, 뛰어난 선각자 스님들을 통해 중국이나 서구 근대사상도 접할 수 있었다.
한용운은 19세 즈음 처음으로 집을 떠나 1903년 25세 무렵 완전히 출가해, 설악산 백담사로 가 27세에 법명을 받았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세계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한반도를 넘어 시베리아 대륙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고, 당대 유명한 학생이던 이학암 스님, 만화 스님 등 스승들을 통해 참선하며 불교 사상과 수행 체계를 정립해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근대 한국 불교의 선구자들이라고 할 박한영, 방한암, 송만공과 같은 수행자들과 두루 사귀면서 그의 불교 사상은 더욱 깊이 발전했고,《음빙실문집》, 《영환지략》 등 중국 개화 서적들을 통해 19세기 말 격동하는 세계의 움직임에 눈을 뜨고 서구 근대사상에 대한 학문 욕구 또한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앞서가던 일본으로 유학 갈 기회를 잡은 한용운은 선진 의식으로 가득 찬 유학생들을 통해 민족 독립의 열정을 키우고, 민족 사상이나 불교 사회주의 사상도 접했다. 이 만남들은 그를 조선 불교 개혁과 3·1 운동으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든 한용운은 불교계를 대표해 3·1 운동에 앞장섰고 그 결과 1919년 3월 1일부터 1922년 3월까지 만 3년간 옥고를 치른다. 이후 주로 선학원에서 지내며 불교 대중화 사업에 몰두했고 조선 불교 청년회 총재에도 취임하지만, 일제의 압박이 심해져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해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를 일약 유명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님의 침묵>을 완성했다. 그 뒤 신간회, 조선 불교 총동맹 등을 통해 독립운동과 불교 단체의 사회 운동을 활발히 했고 월간지 <불교>를 인수해 불교 대중화와 독립 사상 고취에 힘썼으나, 193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공개적인 민족운동은 불가능해졌다. 불교계 청년 운동가들이 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해 한용운을 총재로 추대했으나 불교계 내분 등으로 자진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용운은 서울 성북동 산기슭에 작은 한옥 심우장을 지어 수행자로 정진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생활은 가난하고 고독했지만 지조를 지키며 정진한 한용운은 1944년 66세로 세상을 떠나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불교계의 저명인사였던 인물로서는 지극히 초라한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해방 뒤에도 한용운은 식민지 치하 고난의 시대를 서릿발 같은 기상과 높은 절개로 살다 간 위대한 ‘민족 지성’으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한용운의 정신적인 고향이라 할 설악산 백담사 기슭에는 만해 마을이 조성되었고 해마다 만해 축전이 개최되고 있으며 민족 문학의 상징이라는 차원에서 만해문학상까지 제정되었다. 심지어 ‘만해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길 정도로 한용운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이루어졌고 그를 기리는 다양한 사업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에 담긴 만해 한용운의 선구적인 사상과 실천 정신


이렇듯 만해는 평생 식민지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실천적인 삶을 살다 갔다. 《조선불교유신론》 또한 불교 혁신을 통해 조국 근대화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다짐이자 모두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결과물이었다. 그 핵심은 전통 불교의 미신·기복·은둔적인 성격을 탈피해 불교 본래의 정신, 즉 중생 구제와 자유평등 실현을 회복하는 것, 시대에 맞고 나아가 시대를 선도해 가는 근대 불교로 새롭게 태어나자는 주장이었다. 오늘날 《조선불교유신론》이 근대 한국 불교의 개혁 정신을 밝힌 탁월한 저술로 평가받는 이유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불교를 총체적·다각적으로 진단하고 비판을 가했다는 점, 근대사상과 불교 사상을 토대로 논리적이고 혁신적인 대안을 내놓았다는 점,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도 한국 불교가 해야 할 종교·사회적 역할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예견한 점 등에 있다.
물론 《조선불교유신론》에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당시 교단의 현실 고충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혁신에만 조급했다는 점, 승가의 계율 문제를 중추원, 통감부 같은 식민지 권력에 의지해 해결하려 한 점, 대안으로 제시한 방안들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조선불교유신론》은 한국 근현대 불교가 나아갈 방향과 대안을 제시한 보기 드문 걸작이며, 한용운이라는 인물 자체가 근대 불교 개혁에 앞장서고 그 실천을 위해 평생을 바친 열렬한 지도자요 뛰어난 선각자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용운은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에 대해 철학적 종교이며 미래에 도덕과 문명의 원천이 될 위대한 종교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미신적이며 왜곡된 불교를 혁신하고 본래 불교 정신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불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교의 본래 정신을 회복하자는 차원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한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의 사상적 기초는 참다운 믿음의 대상은 밖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다는 깨달음을 향한 선종 본래 정신을 회복하자는 데 있다. 당시 불교는 너무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한용운은 부단한 개혁을 촉구했지만, 결국은 중생과 더불어 해탈에 이른다는 선(禪) 불교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야말로 유신의 근본 해법임을 잊지 않았다.
만해는 일본에 잠시 유학하면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봉건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급격히 탈바꿈한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했고, 일본 불교의 근대적 발전을 관찰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온 뒤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1909년에 집필을 끝냈지만 그 파격적인 주장이 몰고 올 충격과 파장을 의식했던지 출간을 늦추어 1913년 간행한다. 예상대로 승려 결혼이나 의례의 간소화 등 급진적인 주장 때문에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만해가 주장하는 불교 혁신은 상당 부분 올바른 방향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불리한 정세, 불교계의 보수적이고 안일한 자세로 인해 《조선불교유신론》의 개혁안은 현실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해의 정신은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핵심은 부처의 중생 구제 정신 실현, 민족의 자주독립과 발전, 불교와 사회의 근대화와 개혁이다. 이러한 면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불교의 참다운 정신과 중요성과 현대성, 또 우리 근대 역사가 당면했던 개혁과 발전의 과제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여전히 개혁과 발전이 절실히 필요한 오늘날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서, 과거를 통해 시대를 조명하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미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핀스키는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동양에, 이렇게 심오한 사상을 지닌 시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게다가 식민지였던 조선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문학의 깊이에 찬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만해 한용운의 선구적인 사상을 응축한 결과물인 《조선불교유신론》은, 오늘날 우리 종교와 사회에서도 ‘유신’해야 할 과제들을 끊임없이 되찾고 개혁의 길을 모색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